[제약인 유일한 박사②] 미국으로 떠난 9살 소년
[제약인 유일한 박사②] 미국으로 떠난 9살 소년
  • 박정식 기자
  • 승인 2019.07.16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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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아래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 그는 새로운 기업 윤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린 기업가이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절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정직과 신뢰가 담긴 행동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희생적이고 빛나는 업적은 각종 자료와 문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유일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적 유산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헬스코리아뉴스 / 박정식 기자]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듯 시대적 위기가 닥치면 영웅이 탄생한다. 우리나라 역사가 그러했다.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침탈을 당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죽음으로 나라를 지켰다. 고려 말에는 최무선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해 이를 무기로 개발,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고통을 받던 백성들을 구해냈다.

이들과 같은 영웅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조국과 민족 사랑을 몸소 실천했으며, 백성들에게 위기 극복에 대한 통찰과 영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도 이순신 장군, 최무선 같은 영웅이자 스승이 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다.

유일한 박사는 50이라는 나이까지 몸소 독립운동에 나서는 한편 제약회사를 설립해 독립군 자금을 조달하고 국민 건강을 개선해 일제로부터 주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광복 이후에는 기업인으로서 정직과 신뢰, 사회공헌이라는 모범사례를 남겼으며,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가로 활동했다.

이 같은 사실만 나열하더라도 유일한 박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낳은 시대적 영웅이며 귀감이라 할 수 있다.

 

1895년 ‘격동과 혼란’의 평양

미래라는 것은 누구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 더 나은 미래의 비전을 찾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현재의 상황을 투영해 봐야 한다.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부르짖는 오늘날,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주목하는 이유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격동과 변혁의 시기인 조선 말기, 근현대사의 한 중심에 있었다. 예측불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묘하게 닮아 있다. 

유일한 박사가 태어난 1895년.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이 계속됐다. 내부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이라는 홍역을 치렀고 외부적으로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외세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다. 

신미양요와 운요호 사건 이후에는 외국의 선교사 등을 통해 신식문물이 흘러 들어왔다.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에게는 충격적 사건의 연속 이었다. 

일련의 변혁은 근현대사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호롱불 대신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됐고 말을 대신해 전차가 달렸다. 선교사는 학교를 설립하고 신식학문을 가르쳤으며 국민들의 의식은 하나하나 계몽되었다. 

유일한 박사가 태어난 평양은 기독교의 영향이 컸다. 세력을 잃고 중앙에서 밀려난 양반가나 평민들이 구성원의 중심이었으며, 불교 등 기존 종교 세력은 미약했다. 그러다보니 평양 일대에서는 기독교 세력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주류를 형성한 곳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교육기관 설립이다. 실제로 평양은 숭실학당을 비롯해 기독교 교육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면서 3·1운동 이후 근대 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곳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자리한 평등사상과 기독교의 영향으로 신식교육과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현재와 비교한다면 자유경제구역인 인천의 송도쯤 이라고 할까. 

물론 이러한 상황이 긍정적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신문물의 도입은 충과 효를 중히 여기던 조선의 존립 근간을 흔드는 도화선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역시 국론분열이다.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통일하고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뛰어든 소년

유일한 박사는 9살 어린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는 9살 어린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사진=유한양행)

격동과 혼란의 시대 속에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은 빛났다. 그는 항상 새로움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유일한 박사는 1904년 9살이 되던 해 순회공사 박장현을 따라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한 달여 긴 항해 끝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했다. 빠듯한 여정은 그에게 휴식을 허락지 않았다. 유일한 박사는 미국 중부 지방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고, 그의 최종 목적지인 네브라스카로 향했다.

네브라스카 주 카니에 도착한 유 박사는 두 자매의 양자로 들어간다. 그는 이곳에서 일을 사랑하고 근면한 일생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영어를 공부했다. 틈만 나면 청소와 물 긷기, 장작 패기, 물건 나르기 등의 집안일은 물론 농사까지 도왔다. 자신의 집 뿐 아니라 옆집을 돌며 석탄을 날라주고 불을 피워주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중학교 이후부터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신문팔이를 시작했으며, 방학 중에는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으며 심신을 단련했다.

 

한인 소년병 학교 재학시절 모습. (사진=유한양행)
한인 소년병 학교 재학시절 모습.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는 공부뿐만 아니라 스포츠에도 발군의 재능을 보였다. 어렸을 적부터 농사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과 남다른 정신력으로 미국에서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가 됐으며, 선수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유일한 박사는 과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 것에 대해 “운동선수로서의 투지와 기질이 후일에 어떠한 난관도 뚫고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며 “사람들과 함께 협력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게 해줬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러면서 “투지와 기질이 나 자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 바탕”이라고 했다.

이와관련 재미난 일화 하나가 있다.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유일한 박사의 아버지인 유기연 선생은 “그런 운동은 그만두고 공부에만 열중하라”라는 질책과 충고를 보내왔다. 아들이 훌륭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공부에만 전념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운동 때문에 공부에 지장을 받는 일은 없다. 미국에서는 공부만 잘하는 것보다 다양한 능력과 리더십을 갖추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런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재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유일한 박사가 미국 고교 재학시절 미식축구선수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
유일한 박사가 미국 고교 재학시절 미식축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모습. (가운데 한국인이 유일한 박사다.)

유일한 박사는 토론과 웅변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대중에게 호소력과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인생에서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훗날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참여한 한인자유대회에서 한인대표로 결의문을 작성하고 낭독하는 일을 맡게 된 것도 어린시절 토론과 웅변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 진학을 앞둔 유 박사는 조국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뜻밖의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부친의 사업이 실패해 온 가족이 고생하고 있으니, 고등학교를 마치는 대로 귀향해서 가사를 도울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지금 꼭 돌아가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진 유 박사는 결국 미국에 남기로 결심했다. 가족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조국에 도움이 되는 큰 사람이 되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였다. 대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가족을 돕기 위해 돈을 벌기로 마음 먹었고 급한대로 은행 대출을 받아 가족에게 보내주었다.  

유일한 박사는 은행 대출금을 갚기 위해 대학 진학도 잠시 미뤄야했다. 대신 그는 1년간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에디슨 발전기 회사, 지금의 제너럴일렉트릭(GE)에 취업했다.

이때가 1915년, 그의 나이 20살 이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조국과 민족, 그리고 가족과 친지들이 수난을 겪고 있던 시기. 꿈 많은 젊은 청년은 훗날을 기약하며 외로운 이국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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