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인 유일한 박사⑤]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세우다
[제약인 유일한 박사⑤]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세우다
  • 박정식 기자
  • 승인 2019.07.26 1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아래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 그는 새로운 기업 윤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린 기업가이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절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정직과 신뢰가 담긴 행동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희생적이고 빛나는 업적은 각종 자료와 문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유일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적 유산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헬스코리아뉴스 / 박정식 기자] 일제의 탄압에 울부짖는 조국의 현실을 목격한 청년 유일한에게 미국 식품회사 일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일한 박사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라초이 식품회사 동업자이자 친구인 월레스 스미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숙주나물 생산과 판매가 증가하며 회사가 날로 번창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위험한 고국으로 발길을 돌리겠다는 유 박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월레스는 “미국에서 사업을 크게 성공시켜 경제적으로 국가의 독립을 후원하고 교육과 민생문제를 돕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유 박사를 설득했지만,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막대한 귀국자금으로 의약품부터 구입 

라초이 식품회사를 월레스에게 넘기면서 유일한 박사는 자신의 지분을 정리해 약 25만 달러라는 귀국 자금을 마련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3억원에 가까운 돈이었으니 어머머마한 자금이었다. 유 박사는 귀국에 앞서 의사이자 부인인 호미리 여사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의약품을 선별하고 구매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큰 돈을 가지고 조국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의약품을 들여가는 것이 동포를 위해 더욱 값진 일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당시 우리나라는 서양의학이 이제 막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양질의 의약품이 보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 호미리 여사가 한국에 병원을 개업할 경우 품질 좋은 양약 확보는 필수였다.

유일한 박사가 귀국을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은 서재필 박사에게도 전해졌다. 서 박사는 미국에서 자신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청년 유일한과의 작별이 아쉬웠으나 말릴 수 없었다. 누구보다 유일한 박사가 미국의 성공을 뒤로하고 조국으로 향하고자 하는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미국을 떠나기 5일 전. 유 박사는 서재필 박사를 찾았다. 얼마전 조국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과 귀국 준비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서재필 박사는 격려와 함께 버드나무 목각화를 건넸다.

버드나무 목각화는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던 서재필 박사의 딸 스테파니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시원하게 쉴수 있는 사업을 하라’는 의미의 이 버드나무 목각화는 유한양행의 로고가 되어 민족기업의 상징이 됐다. 

유일한 박사는 서재필 박사에게 받은 버드나무 목각화와 의약품을 가지고 1926년 부인인 호미리 여사와 함께 고국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의 나이 31세되던 해이다.

 

1926년 12월 유한양행 설립

1926년 귀국 당시 신문에 게재된 유일한 박사와 호미리 여사. (사진=유한양행)
1926년 귀국 당시 동아일보에 게재된 유일한 박사와 호미리 여사.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귀국 소식은 당시 큰 화제였다. 서울역에서 유일한 부부를 기다리고 있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부부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다음날 신문에는 ‘적은 자본으로 식료품 장사를 시작해 수백만원의 큰 회사를 이룬 유일한 씨, 중국인 부인과 귀국’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열렬한 환영 인사를 받은 유일한 박사는 의약품 사업을 준비했다. 세브란스병원 설립자인 에비슨 박사로부터 의약품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구입한 의약품이 있으니 사업을 한다면 일본 정책에 억눌려 있는 한국 산업계를 부흥시키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1926년 12월 10일. 드디어 유한양행을 창업했다. 그가 유한양행을 창업하고 처음 시작한 일은 미국에서의 의약품 수입이었다. 문제는 수입한 의약품의 판매처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때 유 박사는 직접 가정을 돌며 홍보를 했던 미국에서의 식품회사 운영 경험을 떠올렸다. 당시처럼 유 박사는 선교사들이 설립한 병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유한양행이 수입한 약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영업사원(MR)의 역할을 사장이 직접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수입한 좋은 약이라는 장점과 유일한 박사의 인품이 더해지면서 유한양행의 의약품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을 비롯해 평양 기혈병원, 전주 예수병원, 순천 미동병원 등 전국 각지의 병원으로 퍼져나갔다. 

제약인이 된 유일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판촉 활동을 이어갔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는 나귀에 의약품을 싣고 약국을 방문했다. 유한양행의 의약품들은 시간이 갈수록 수요가 늘었다. 유 박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조국 번영에 이바지하겠다는 직원들의 열정이 낳은 결과였다. 

 

염료와 농기구까지 보급했던 제약인 유일한 

1926년 종로2가 덕월빌딩을 사옥으로 삼아 창립된 유한양행. (사진=유한양행)
1926년 유한양행이 입주한 종로2가 덕원빌딩.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는 약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의사가 없는 시대에 좋은 약으로 국민 보건을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의약품 이외의 사업으로 국민경제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박사는 곧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화장지, 생리대, 락스, 비누, 치약 등 위생용품을 수입해서 판매했다. 특히 유 박사는 염료와 농기구 수입을 중요하게 여겼다. 의약품 판로 확대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주했던 우리 민족의 고단하고 빈곤한 모습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눈여겨 본 것은 사람들이 입고 있는 흰옷이었다. 흰옷은 때가 빨리 타기에 자주 세탁을 해야 했으며, 이는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인력 낭비가 심한 일이었다. 이를 주목한 유 박사는 색깔 있는 옷을 입는다면 세탁할 일을 줄일 수 있겠다 생각해 염료 수입을 결심했다. 

농기구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농민들 역시 유일한 박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제대로 된 농기구만 있으면 힘을 덜 들이고 단시간에 일을 끝낼 수 있어 농촌 경제 부흥과 국민 복지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접한 유일한 박사 머리 속에는 염료와 농기구로 이익을 얻는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대의를 위해 염료와 농기구를 보급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유 박사는 수입품을 염가로 판매하고 다른 상품에서 얻은 이익으로 꾸준히 염료와 농기구를 보급해 나갔다.

 

신문광고 통해 국민의식 계몽

젊은 사업가로 변신한 유일한의 ‘고국 사랑’은 유한양행이 신문에 게재한 광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한양행은 1928년 3월5일자 동아일보에 최초로 염료 광고를 냈다. 염료를 많이 팔아 수입을 올리기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염료를 알려 보급시키겠다는데 목적을 둔 것이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염료를 보급해 그들의 경제적 활동을 돕고 싶은 유일한 박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신문광고를 한 것은 국민들의 의학 지식과 의식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는 약 판매뿐만 아니라 기업에 대한 이미지와 신뢰도를 크게 높였다.

1930년 10월15일자 신문에 낸 광고에는 “의사를 찾아 상의하시고 복용하시오”라는 글귀를 넣었으며, 같은 해 10월30일자에는 어떻게 의사와 상의해서 의약품을 사용해야 하는지, 친절한 안내와 설명을 광고에 곁들이기도 했다.

“교육을 받으면 실업자가 없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박사는 의약품을 병원과 약국에 보급하는 인력 육성 노력도 병행했다. 의약품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은 청년들을 영업사원으로 채용해 고용확대에 기여한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우선이고, 그들을 사랑하는 유일한 박사의 진심이 통했을까 유한양행은 설립된지 3~4년 만에 일본 제약업계와 승부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사세가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박사는 고민했다. 우리 경제의 앞날을 생각할 때 수입과 판매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유한양행이 문을 연지 6년째가 되던 1932년. 그의 나이 37세. 유일한은 또 한번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추천 뉴스
의사들의 메디컬 이야기
베스트 클릭
여론광장
오늘의 단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