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인 유일한 박사⑦] 나라사랑도 대물림했던 집안
[제약인 유일한 박사⑦] 나라사랑도 대물림했던 집안
  • 박정식 기자
  • 승인 2019.08.0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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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아래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 그는 새로운 기업 윤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린 기업가이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절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정직과 신뢰가 담긴 행동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희생적이고 빛나는 업적은 각종 자료와 문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유일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적 유산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헬스코리아뉴스 / 박정식 기자] 해방 이후 유일한 박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기에 앞서 유 박사의 개인사가 담긴 가족 이야기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기자일기를 이어가는 동안 그의 가족사를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이 안에는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유 박사의 진솔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태어난 환경과 자라온 환경이 사람을 만들며, 그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유일한 박사의 가족사도 예외가 아니다.

 

‘부전자전’ 애국심

유일한 박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부친인 유기연 선생(왼쪽)과 촬영한 사진.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부친인 유기연 선생(왼쪽)과 촬영한 사진.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가 성공한 기업가에 그치지 않고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그의 부친인 유기연 선생의 영향이 컸다.

1895년 1월15일 유일한 박사가 태어났을 당시 유기연 선생은 평양 중심가에서 농산물과 해산물 도매상 경영뿐 아니라 재봉틀 파는 일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평양으로 주거지를 옮긴 유기연 선생은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받아 들이는데 거부감이 없는 조선에서 몇 안되는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유일한 박사가 9살 어린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개척가적 · 모험가적 기질도 있었지만, 부친의 결심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유기연 선생은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나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조국의 장래를 위해 뛰어난 인재를 길러야한다는 생각으로 고민이 깊었다. 그 인재들을 유교, 불교 같은 전통 종교나 당시의 교육으로는 길러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신흥종교인 천도교의 교리가 미래 인재상의 정신적 가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앞서가는 일본처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유학을 통한 새로운 인재를 육성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유 선생은 망설임 없이 장남 유일한을 미국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평소 영특한 자질을 보였던 유 박사라면 식견을 넓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이자 영웅으로 성장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박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후에도 유기연 선생은 언제나 장남의 의견에 믿음과 지지를 보내줬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유일한 박사의 본래 이름은 일한이 아니고 일형(一馨) 이었다. 그러던 것을 조국을 위해 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형’을 한국의 ‘한’(韓)으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고민도 없지 않았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본인이 개명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 박사의 걱정은 기우였다. 아들의 개명 소식을 편지로 접한 유기연 선생은 오히려 아들의 애국심에 감동이 담긴 답신을 보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생들의 이름까지 모두 한(韓)으로 돌림자를 바꾸며 유 박사의 의견에 믿음과 지지를 보냈다. 이는 유기연 선생이 자신의 아들이 혼란스런 조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웅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30세 청년, 가정을 일구다

1904년 미국으로 떠난 이후 숙주나물 사업 성공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30세 청년 유일한은 1925년 중국계 미국인 의사 ‘호미리’ 여사와 결혼을 한다. 이후 4년 뒤인 1929년에는 후일 일생의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될 첫 딸 유재라씨를 얻고, 6년 후에는 유일선씨가 탄생하며 1남1녀를 둔 단란한 가정을 이룬다.

남편의 뜻에 따라 한국에 온 부인 호미리 여사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세브란스 병원 설립자인 에비슨 박사는 그에게 소아과 의사직을 제안하지만, 호미리 여사는 서대문 부근에 차려진 작은 진료소에서 환자진료에 전념했다.

호미리 여사가 환자를 돌본 서대문 진료소는 유일한 박사의 숨겨진 업적 중 하나다. 유 박사는 의약품뿐 아니라 예방과 치료로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데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부인의 도움으로 문을 연 서대문 진료소를 통해 실천에 옮겼다.

이곳에서 호미리 여사는 병원운영 책임의 일부를 맡았고 저렴한 가격으로 환자를 치료했다. 이후 약품 개발에 매달리는 등 남편인 유일한과 한민족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쏟아 부었다.

유재라씨는 생전에 어머니인 호미리 여사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지혜가 깊어져 많은 사람이 어머니를 존경했다.”

 

유일한 박사 가족사진. 왼쪽부터 유일한 박사, 딸 유재라씨, 아들 유일선씨, 부인 호미리 여사.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가족사진. 왼쪽부터 유일한 박사, 딸 유재라씨, 아들 유일선씨, 부인 호미리 여사. (사진=유한양행)

 

집에선 자상한 아버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호미리 여사도 가정에서는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자녀 교육에서 만큼은 엄격했다. 반면 유일한 박사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유재라씨는 “아버지는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딸에게 낚시질을 가르치며 즐겼고 승마를 즐겼으며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유 박사는 자녀들에게 기대를 가지면서도 질책을 하거나 책망하는 일이 별로 없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 예외가 하나 있었다. 바로 유한양행의 공적사업에는 가정적 사심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변 사람들의 권유가 있었고 불가피한 사정으로 형제들 중에 몇 명이 유한양행에 개입한 일이 있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언제나 가혹할 정도로 냉정했다.

이 같은 내용은 유일한 박사와 아들 유일선씨의 일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유한양행 임원진들은 유일한 박사에게 록펠러,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사례를 들며 후계자 자리에 유 박사의 아들인 유일선씨를 앉혀야 한다고 설득했다. 임원진들의 요청에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유일선씨는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부사장에 취임했다.

성과와 실적을 중요하게 여긴 유일선 부사장의 경영방식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 같았다. 당시 달리는 기차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인 유일한 밖에 없었을 정도로 유일선 부사장의 경영방식은 독단적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회사에서 일하는 것을 처음부터 탐탁치 않게 여겼던 유 박사는 결국 1969년 회사와 한마디 상의 없이 유일선 부사장을 해고해 버렸다. 

아들의 경영방식이 기업인으로서 틀린 자세는 아니었으나 이윤 창출보다 국가와 민족을 우선했던 유 박사의 삶의 철학과 맞지 않않기 때문이다.   

유일한 박사는 아들 유일선 부사장을 해고하기 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순위가 국가, 교육, 기업 그리고 가정이다. 이것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일선 부사장은 “먼저 개인이 있고 그 후에 가정과 교육, 기업,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답했다.

아들의 답변에 아버지 유일한은 단호히 말했다.

“나는 유한양행을 그런식으로 키우지 않았다. 국가부터 튼튼해 지도록 돕고, 그 다음에 국가의 일꾼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기업과 가정은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적어도 지금의 이 시점에서는 그래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임하다 보면 내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한양행이 우리나라 기업 최초로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하고 현재까지 이런 경영문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유 박사의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나눔의 삶을 실천해 ‘한국의 나이팅게일’로 불렸던 유순한 여사(유일한 박사의 여동생)는 유일한 박사의 공과 사를 구별하는 태도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유일한 사장의 태도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옳았다.”

다음 회부터는 해방 이후 유일한 박사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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