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인 유일한 박사⑧] 해방된 조국 … 끝나지 않은 위기
[제약인 유일한 박사⑧] 해방된 조국 … 끝나지 않은 위기
  • 박정식 기자
  • 승인 2019.08.12 1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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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아래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 그는 새로운 기업 윤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린 기업가이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절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정직과 신뢰가 담긴 행동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희생적이고 빛나는 업적은 각종 자료와 문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유일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적 유산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헬스코리아뉴스 / 박정식 기자]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유일한 박사와 유한양행의 고난은 계속됐다.

1946년 7월. 유일한 박사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을 때만 하더라도 그의 가슴 속에는 진정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으로 가득찼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한반도는 또다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열강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일제의 수탈로 국민경제 역시 무너져 있었다. 여기에 사회적 혼란까지 더해졌으니 정상적 기업 활동을 수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약업계도 이러한 상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일제 말기 제약원료의 조달을 차단 당하면서 비축원료는 이미 고갈된지 오래였다. 설상가상으로 제약기술자마저 부족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제약회사와 맞서며 국민들의 보건복지를 증진시키고, 독립군의 군자금을 조달했던 유한양행 역시 일제의 모진 탄압에 재정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국토가 분단되면서 북한에 있는 자산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은 물론 만주·중국 등지에 구축한 해외 영업기반까지 무너졌다.

암울한 현실에도 유일한 박사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한양행을 재정비해 의약품 수출입을 기반으로 자동차수입업, 철공업, 선박, 한국 토산품의 수출업 등으로 사업분야를 확대해 국가경제 재건에 기여하겠다는 포부가 가득했다. 마음을 굳힌 유 박사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유한양행의 사업분야를 확대하고 적극적인 기업활동을 위해 자신을 대표 취체역(이사) 사장으로 한 새로운 경영체제를 구축했다.

 

1946년 유일한 박사가 가족과 촬영한 사진. (사진=유한양행)
1946년 유일한 박사가 가족과 촬영한 사진. (사진=유한양행)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

유일한 박사가 귀국하고 유한양행에 새로운 경영체제를 구축할 때 쯤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었다. 유 박사가 미군정의 요청으로 상공관계 책임자 자리에 오른다는 것. 미국통 실력자이면서 인품과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 박사는 미군정의 요청에 대해 일절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업인으로 남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유 박사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주변 여건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해방과 함께 창설된 대한상공회의소는 유일한 박사를 초대 회장으로 모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유 박사 역시 민간 산업단체의 지도자 위치라면 사양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중요한 기관의 방향과 기틀을 잡아준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 생각했다.

다만 유한양행 사장직을 유지한 채 상공회의소 회장직을 겸한다는 것은 그에게 바람직한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상공회의소 회장직은 국가의 경제 재건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공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일한 박사는 사장직에서 물러나 고문역인 유한양행의 회장직을 맡았다. 사장이 공석이되자 유한양행 내부에서는 유 박사의 동생인 유명한이 다시 사장직을 맡을 것이라 생각했다. 유일한 박사가 사장 자리를 비우는 동안 슬기로이 위기를 넘기며 유한양행을 이끌어 온 공로가 있으며 무엇보다 유 박사의 가족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유 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기업의 자본과 경영 분리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올바른 원칙이었으며 이 원칙이 앞으로 한국 기업의 철학으로 자리잡길 바라는 염원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선 유한양행이 개인이나 한 가문의 소유라는 생각을 불식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결국 유 박사는 사장으로 구영숙을 선정했고, 동생 유명한에게는 3명의 고문역 중 한 사람으로 배정했다.

 

다시 조국을 떠난 유일한 박사

1946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수락한 유 박사는 그해 12월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 버린다. 유일한 박사의 성격이나 책임감으로 봤을 때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현재까지 많은 말들이 나오고 있다.

1941년 발발된 태평양 전쟁으로 거래관계가 중단된 미국 제약회사들과 새로운 발전적 유대관계를 체결하고 원료와 제품 수입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떠났다는 설이 있는 반면, 당시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과의 의견 차이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유일한 박사가 생전에 이 일에 대해 내색을 보이거나 발설한 일은 없다. 다만 앞뒤 정황을 맞춰보았을 때 의견불화가 있었다는 쪽으로 무게 추가 실리고 있다.

실제로 당시 주변인들 진술에 따르면 유일한 박사는 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직을 맡기 전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이화장(개인사저)을 방문했다. 유 박사의 방문을 반긴 이승만은 “함께 앞날의 조국을 위해 일하자”고 당부했고, 이 말에는 자신이 정권을 잡게 되면 함께 내각에 참여해서 일하자는 권유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정치와 경제는 별개며, 현재 조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정치보다 경제였다. 유 박사는 기업과 민생 문제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이승만의 정치 참여 권유를 완곡히 거절했다.

이승만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이화장을 빠져나온 유 박사는 어느 정도 정치자금을 기대했던 이승만의 심중을 모를리 없었다. 설령 이승만이 가만히 두더라도 그의 측근들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에게 협력하는 것은 유한양행은 물론 조국에 도움이 될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 박사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나라는 좌우익의 투쟁과 싸움으로 민생경제는 뒷전일 뿐이었다. 이런 정황들로 인해 유일한 박사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쟁 발발 … 유한양행 위기 속으로

1950년 6월25일 한국은 또다시 전란에 휩싸인다.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북한이 갑작스레 남한을 침략한 것이다. 전쟁 준비를 마친 공산군을 당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어느새 부산을 필두로 한 방어선마저 지키기 힘겨웠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유일한 박사는 이 소식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유한양행의 절반을 빼앗겼다면 이번에는 그 기반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유한양행과의 소식은 끊겼으며 간부와 동지들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기에 그의 심정은 암담 그 자체였다.

다행인 것은 그가 미국에 체류하며 전쟁의 상황과 국제적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51년 유일한 박사는 미국에서 일본 도쿄로 들어갔다. 유 박사가 일본에 도착했단 소식을 접한 유한양행은 유특한(유일한의 동생)을 도쿄로 파견해 그간의 일을 보고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협의토록 했다.

유특한을 만난 유 박사는 당장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지시를 내리는 한편 전쟁 이후 유한양행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유한양행이 책임져야 할 앞으로의 과업이 어떤 것인가를 모색하고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부산 피난지에 자리한 유한양행은 유 박사의 뜻에 따라 대구과 생선에서 추출한 노란기름인 간유에서 ‘정제 비타민’을 생산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 비타민은 전쟁과 피난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 영양부족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다시 일어나는 유한양행

6·25 전쟁 피난 시절 부산에서 유한양행이 임시 사옥으로 거쳐하던 곳. (사진=유한양행)
6·25 전쟁 피난 시절 부산에서 유한양행이 임시 사옥으로 거쳐하던 곳. (사진=유한양행)

한반도에서 벌어진 3년간의 긴 전쟁의 끝은 결국 휴전이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없었던 유한양행 역시 손실이 너무나도 컸다. 해방 이후 유한양행을 이끌어왔던 구영숙 사장 역시 사장직을 내려놓았다.

유한양행은 다시 한 번 안전기반까지 이끌 수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고 결국 유일한 박사가 다시 한 번 사장으로 재취임하게 된다. 서울에 도착한 유일한 박사는 한 가지 희망을 보게된다. 비록 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렸지만 복구를 위한 망치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졌던 것이다.

“한국은 아직 살아 있으며 희망이 꺾이지 않았다.”

유 박사 역시 유한양행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본사를 다시 짓고 소사 공장을 수리하는 한편 최신 화학 실험연구실의 설치를 서두르는 등 시설을 보충했다. 나아가 대대적인 증자를 감행해 원료 확보에 나섰다. 사내 업무 부서도 개편해 새로운 일꾼을 계속해서 모집해 나갔다.

유한양행 재건에 박차를 가한 것과 함께 중요한 것은 이 시기를 전후해 유일한 박사가 ‘기업정신과 이념’을 재정리해 유한양행 식구들에게 계속 주지시켰다는 점이다. 회사 간부들을 엄격히 훈련시켰고, 사원들에게는 기업을 통해 인생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의 정신을 거듭 강조했다. 유 박사가 강조한 유한양행 정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 그렇게 하기 위해 첫째, 경제수준을 높이며 둘째,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고 셋째, 각자와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 그러므로 각 책임자들은 항상 참신한 계획과 능동적인 활동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자.

이와 함께 자신의 신조인 ‘성실과 정직’을 부하 직원들에게 강조한 것은 물론 회사 운영과 사원 통솔에 엄격함을 보였다.

유한양행에 몸담으며 가장 오래 유일한 박사를 도왔던 홍병규 사장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분이 아랫사람에게 책망한 것은 학생이 선생에게 매질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인심 후한 선생보다 엄격한 선생이 더 낫다는 말처럼, 그분은 사장이자 회사의 경영 스승이었으니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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